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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신라 왕 17대 내물 마립간 21대 소지 마립간 22대 지증왕

by 건강 메거진 2024. 11. 25.

  신라는 천년 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 전체에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국가이며, 김씨에 의한 독점 세습이 이루어 지면서 왕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중앙집권적인 왕국이 아닌 부족 마을 연합을 이끌었던 신라는 최고의 통치자란 뜻의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였다. 이 호칭은 17대 내물마립간부터 21대 소지마립간(500년)까지 150여년 동안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으며, 지증마립간 치세부터 왕호를 '왕'으로 바꾸며 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하였다.

신라 왕 17대 내물 마립간 21대 소지 마립간 22대 지증왕

17대 내물마립간(재위 356년~402년)

   신라는 김씨에 의한 독점세습이 이루어 지며 왕권이 강화되면서 17대 내물마립간 치세부터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며 왕의 권력이 강력하게 세워 졌음을 알렸다. 이 시기부터 신라는 단순히 부족 연맹을 넘어 왕권 중심의 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내물마립간은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내물마립간은 신라 최초의 마립간 칭호를 사용하면서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 차지하는 등 지배 세력을 강화하며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이전까지는 박, 석, 김의 세 성이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했는데 흘해이사금에게 아들이 없어 김씨인 내물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52대 효공왕(897~912)까지 김씨에 의한 왕위 독점 세습을 시작하였으며,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366년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으나 373년 백제의 동산 성주가 투항해 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한 일로 근초고왕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 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대왕 원군의 도움으로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게 되고,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의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한 중국과 교류하여 한자와 같은 문자를 들여오기도 했다. 

 

21대 소지마립간(재위 479년~500년)

  21대 소지마립간은 20대 자비마립간의 아들(김씨)로 백제, 가야와의 동맹으로 민생을 중시한 정치를 하였다. 소지마립간은 6 부족 연맹체로 이루어진 신라의 구조를 더욱 중앙집권적으로 만들기 위해, 각 부의 권한을 왕에게 집중시켜서 신라를 보다 효율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해지도록 신라의 행정 체제를 재정비 하였다.

 

또한 지방관 파견 제도를 시행하여 중앙 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확장하여 신라의 왕권은 더욱 강력해 졌고,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국가 운영이 이루어졌다. 지방 관리의 파견은 국가 통합과 왕권 강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신라는 백제의 동성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백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두 나라 사이의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여 삼국 간이 균형을 유지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대비하여 하였다. 이 결혼 동맹은 이후 신라와 백제 간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소지마립간의 통치 동안 신라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 졌고, 관리와 백성들의 역할이 명확해 지기 시작하였다. 즉위 9년(487년)에 신라의 최초 우편 제도인 우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개척하며 국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왕실과 지방 관료 간의 소통이 더욱 빨라지면서 단순한 문서 전달을 넘어서 정보와 명령의 신속한 전달을 가능하게 하였다. 490년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키고 각 지방을 순행하며 유랑하는 백성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썼다. 소지마립간 시대의  불교는 공식적인 국교로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귀족층 중심으로 불교가 점차 확산하였다. 불교를 통해 신라의 정신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여 여러 사찰을 건립하고 이를 통해 신라 백성들의 정신적 통합과 종교적 안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함께 국가의 군사적 및 행정적 통일에 큰 도움이 되어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소집마립간이 가장 큰 업적은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 강화이다.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고, 백제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외교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신라는 내부적으로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치세 동안 우편 제도와 행정 체제의 정비는 신라 사회를 더욱 더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었으며,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쳐 이후 신라가 더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2대 지증왕(재위 500년~514년)

  17대 내물마립간의 증손으로 503년에 나라 이름을 '신라'로, 왕호를 '왕'으로 바꾸며 왕권을 강화하다. 또한 순장법을 폐지하고 울릉도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지증왕(智證王)은 소지마립간의 6촌이며 신라 22대 왕으로 63세에 왕위에 올라 15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으며,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로 발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왕이다. 지증왕은 신라 최초로 '이사금(이사금은 원래 왕의 칭호 중 하나였음)'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더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며, 신라가 더 이상 부족 연맹체가 아닌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증왕은 신라의 지방 행정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지방을 군(郡)과 현(縣)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중앙집권국가 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기틀이 되었다. 또한 지증왕 시기에 '사로국'이라는 이름 대신에 처음으로 '신라(新羅)'라는 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신라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512년에 신라가 우산국(현재의 울릉도)을 정복하여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사부 장군이 나무 사자를 이용해 우산국 주민들을 항복시켰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우산국(울릉도) 정복은 신라의 해양 영토확장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지증왕은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농업 발전을 위해 우경(소를 이용한 농사)을 적극적으로 장려 하였다. 이는 농사 기술이 확산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고, 신라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신라는 귀족들이 죽으면 살아있는 남녀 각각 다섯 명씩 함께 묻어버리는 순장풍습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노동력을 보존하고 경제적으로 효율성도 높였다.

 

  지증왕의 치세동안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고, 행정과 법체계의 정비를 통해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국호 사용, 지방 행정 개편, 우산국 정벌, 우경장려, 순장 풍습 폐지등 그의 여러 정책은 신라를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증왕은 신라가 부족 연맹체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중요한 시기에 통치한 왕으로 그의 정책과 업적은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왕권강화를 이끌어 냈으며 이후 신라의 역사와 문화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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